미륵사에 관하여(미륵사창건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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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10-25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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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서 백제가 강성하게 일어나면서 온조왕 26년(AD 8년)에 마한을 함락해 버리고 말았다. 더욱이 각 유물·유적들이 차로 10분, 걸어서 30분 안짝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경주, 부여 같은 왕도가 아니고는 드문 일이다. 그래서 금마 땅에는 마한보다 백제의 자취가 더 진하게 남게 되었다. 부인이 왕에게 이르되 나의 소원이 이곳에 큰 절을 이룩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미륵사지 발굴 결과 이 …(省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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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미륵사
1. 동양 최대 규모, 미륵사
2. 미륵사의 탑
3. 미륵사의 가람배치
4. 미륵사의 몰락
5.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
Ⅱ. 미륵사 창건의 주인공, 무왕
Ⅲ. 무왕이 익산에 미륵사를 세운 이유
1. 동양 최대 규모, 미륵사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 일대에는 참으로 많은 유적이 밀집해 있따 미륵사지, 왕궁평(王宮坪), 오층석탑, 고도리 석인장, 쌍릉 등···익산군 시절에 발간한 「미륵산의 정기」를 보면 모두 82군데의 유적지 해설이 들어있을 정도이다.
금마는 마한의 중심지였다. 연못 위에 절을 세웠다는 것을 비롯하여 절 안에 미륵삼존을 모신 금당과 탑, 복도를 각각 세 곳에 세웠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금마면 기양리에는 동양 최대 규모의 미륵사라고 불리는 절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금마는 몇order (차례) 왕도에 준하는 영광의 도시로 history(역사) 속에서 명멸하였다. 지금까지 그 절이 있따
하룻밤만에 거대한 못을 메웠다는 것은 과장이겠지만 이 설화는 미륵사에 대해 몇 가지 단서를 일러준다. 마한, 백제 무왕의 별궁, 후백제 견훤의 왕궁 등 어느 하나 오랜 경륜을 펴지 못했으나 금마 땅 고도리 왕궁평 들판과 미륵산에는 미완의 왕도가 남긴 유적들이 폐허 속에 즐비하게 널려 있는 것이다.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방책을 물으니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어 미륵삼존과 회전, 탑,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액호를 미륵사라 하니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서 도와주었다. 그러나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이내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이 미륵사의 창건에 상대하여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다가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 삼존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건히 예를 올렸다.